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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떠들썩한 잔치였던 2002년 월드컵이 운동본부에게는 악몽과 같은 시기였다. 월드컵이 막 시작될 즈음 미군 고압선에 감전되어 11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던 전동록씨가 6월 6일 끝내 사망하였다. 

  2001년 7월 16일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카메라 공장 증축현장에서 일하던 전동록씨는 지붕 마무리 공사를 하면서 철판조각이 지붕 위 약 2∼3m 상공 고압선에 닿으면서 감전됐다. 이 사고로 양쪽 팔다리에 4도 중화상을 입었고 상태가 악화돼 결국 모두 잘라내야 했으며, 합병증으로 청각을 잃고 신부전증이 만성화돼 매번 투석을 해야 하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문제의 고압선은 공사장 인근 미군기지 캠프 하우즈에서 기지 외부의 양수기에 전기를 공급하고자 미군측에서 설치, 관리해온 것으로 22,900V나 되는 고압인데도 피복조차 씌워져 있지 않았다.
  공사 시작 전부터 수차례 미군측에 고압선 철거나 이전을 요구하였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 심지어 사고 발생 3일 전에도 미군측 전기 담당자가 현장을 방문했지만 “괜찮으니 일단 공사를 진행하라”는 말뿐이었다. 사고가 난 후에야 미군측은 고압선을 철거하였다. 사과 한마디 없이 위로금 60만원만 건네고 SOFA에 따라 배상 신청을 하라는 원칙적인 입장만을 내세웠다. 

  유족들은 2002년 6월 19일 캠프 하우즈 부대장과 미2사단 공병대장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고 미군측의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미군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조차 보내지 않았고, 캠프 하우즈 부대장이 고소한 지 며칠 후인 6월 28일, 임기를 마치고 출국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허탈케 했다. 검찰은 12월 30일 ‘혐의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장례식이 있던 6월 10일, 일산 병원에서 광화문 노제를 지내기 위해 장례행렬이 길을 나섰지만 병원 앞에서 경찰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장례행렬은 광화문으로 향하지 못했고 고인의 집을 들러 화장터로 향해야 했다. 그날 광화문은 한국과 미국의 축구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붉은 물결로 가득했다고 한다.

  
  사흘 뒤인 6월 13일 지방선거로 휴일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두 여학생이 길을 가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는 것이다. 아프간 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기자가 잘못 전화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어디에서 벌어진 사건이냐고 되물었을 때 양주, 경기도 양주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하였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로에서 대대 전투력 훈련을 위해 이동중이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앞서 갓길을 걷고 있던 신효순(14세), 심미선(14세) 두 학생을 깔고 지나가 모두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고 당일 미8군사령관이 유감을 표명하고 다음날 미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방문해 문상하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위로금 100만원씩을 전달하는 등 발빠르게 사고 수습에 나섰다. 

  운동본부는 현장을 다니고 문제점을 분석하는 대로 보도자료를 내고 인터넷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였다. 하지만 월드컵이 세상을 다 삼켜 버린 상황에서 언론 보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터넷에 게재된 기사는 몇 시간 만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미군측은 사건을 신속하게 수습하려 했으나 사고의 진상 규명에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유족과 주민, 시민단체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6월 19일 미2사단은 한미 합동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이번 사고는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임을 강조하며 사고 원인으로 차량 구조상 오른쪽 시야에 사각지대가 있어 운전병이 학생들을 발견할 수 없었고, 관제병이 커브를 돌아 약 30m 전방에서 학생들을 발견하고 운전병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소음과 타 무전 교신 등에 의한 통신 장애로 제때에 경고가 전달되지 못해 발생한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차량은 시속 8~16km의 속도로 중앙선을 넘지 않고 계속 직진 운행하고 있었으며 마주오던 장갑차는 서로 교행하지 않고 사고 차량과 1m 떨어진 지점에서 정차했다고 밝혀 그동안 유족들이 제기했던 ‘사고차량이 마주오던 장갑차와 교행하면서 갑자기 우측 갓길로 틀었을 가능성’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 발표는 △차량 구조상 시야가 제한되더라도 운전병의 고개 방향에 따라 그만큼 시야가 확보될 수 있는 점 △통신 장애란 통신장비 고장이거나 헬멧을 착용하지 않는 이상 발생하기 어렵다는 점 △궤도차량의 경우 마찰계수가 커서 8~16km의 느린 속도로 운행한다면 제동장치 작동시 보통 그 자리에서 정지하게 되는데, 어떻게 두 명이 일렬로 누워 두개골이 다 깨질 정도로 완전히 밟고 지나갈 수 있는지 △우측 갓길 주변에 갑자기 우측으로 궤도를 틀면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아스콘이 깨지고 풀이 눌린 흔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등의 의혹들에 대해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특히, 차량 속도의 경우 14일 현장 브리핑 때는 16~24km라고 했다가 절반으로 줄여서 발표했다. 주민들에게 훈련사실을 미리 알렸는지 여부도 처음에는 통보했다고 말했다가 마침 그 자리에 참석한 마을 이장이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자 죄송하다며 바로 말을 바꾸기도 했다.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이 라디오 방송에서 “그 누구도 책임질 만한 과실이 없다”고 말하면서 비난여론은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6월 26일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의정부 미2사단 정문 앞에서, 용산 미군사령부 정문앞에서 항의 집회가 진행되었다. 숨진 두 학생들의 친구, 언니, 오빠 등 10대들의 항의행동이 빗발쳤고, 온몸에 쇠사슬을 묶고 미2사단 부대안에 들어가 항의하다 연행되는 사람들, 미군 탱크 앞에 드러눕고 항의하다 연행되는 사람들, 이렇게 분노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커져갔다. 진상규명, 살인미군 처벌, 부시 대통령의 사과, 훈련 방지 대책 마련, SOFA 개정, 이것이 당시 대책위의 요구 사항이었다. 집회가 있는 날마다 비가 내렸던 그해 여름이었다. 

  유족과 대책위는 6월 28일 차량 운전병과 관제병, 미2사단장 등 미군 책임자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고, 미군측의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미군당국은 7월 3일 운전병과 관제병을 과실치사죄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하였고,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의 사과를 전했다. 그러나 미군측은 고소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한국 검찰의 미군 소환 요청에 대해 신변 위협을 이유로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7월 10일 법무부는 사상 처음으로 미군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냈다. 그러나 8월 7일 미군당국은 “동 사고가 공무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이제껏 미국이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다.

  11월 18일부터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미 군사법정에서 미군 재판이 시작되었다. 20일 운전병에 대한 선고를 앞두고 대책위 내에서도 어떤 판결이 날지 의견이 분분했다. 군대를 유지,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고, 피해자와 사건의 진실을 바라보면 유죄 선고가 내려져야 했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든 기대감으로든 유죄 판결 의견이 높았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20일 관제병에 대한 무죄 선고로 물거품이 되었다. 재판 내내 부대 앞에서 집회를 하며 항의했던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는 결과로 분노가 끓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경찰의 폭력이었다. 관제병이 무죄라면 운전병이라도 유죄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22일 무죄 평결로 무참히 짓밟혔다. 두 명의 미군은 무죄 선고를 받고 5일 후인 11월 27일, 짤막한 사과성명을 발표한 뒤 한국을 떠났다. 


  무죄 선고가 내려진 후 대책위는 재판무효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종로 2가에서 서명운동을 한 후 광화문까지 행진을 시도했지만 몇 걸음 못가서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재판 무효! 살인미군 한국법정에서 처벌! 부시공개사과! SOFA 전면재개정! 범국민서명운동’과 광화문까지 행진 시도는 이후 불붙은 촛불 행렬의 시작이었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11월 27일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간접적인 사과를 전하고, 12월 13일에도 부시 미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 당국간 SOFA 개선방침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비를 맞으며 미군부대 앞에서 항의시위로 그해 여름을 보냈다면, 촛불을 든 수만의 사람들은 그해 겨울을 광화문에서 보냈다.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청산해보자, 미국에 바른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는 그해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후보자였을 때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 큰 실망을 주었다. 

  공무중 사건이라 하더라도 사망이나 이에 유사한 상해를 입힌 경우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SOFA를 개정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2005년 6월 10일 다시 공무중이라는 이름 아래 사망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후 1시 50분경 경기도 동두천시 동두천 정형외과 앞 사거리 인근에서 손수레를 끌고 길을 건너던 김명자씨가 브라이언트 일병이 운전하던 2.5t 화물트럭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미군측은 사고 다음날 부시 미국 대통령을 통해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주한미군사령관 등 미군 지휘관들도 직접 고인의 빈소를 방문해 한국식 예법에 따라 큰절까지 하며 조문을 하는 등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피해 유족에게도 5백만원의 위로금을 전했다. 여중생 사건 당시 100만원의 위로금을 전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큰 액수였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재판권 행사에 대한 미군측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법무부의 형식적인 재판권 포기 요청에 대해 미군측은 거부 의사를 표명하였고, 운전병과 선탑자 등을 검찰에 고발하였으나 제기된 사건의 의혹도 해명되지 않은 채 ‘공소권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여중생 압사 사건에 대한 미군들의 무죄 선고 이후 불붙은 촛불 시위도 가라앉을 즈음 대책위가 내걸었던 요구사항 중 어느 하나도 이루어진 게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나마 SOFA 개선안을 통해 훈련 방지 대책이라고 마련된 것이 있었지만 또다시 발생한 동두천 트럭 압사사건으로 그 실효성이 의심되었다. 그래서 신효순 심미선 이름을 떠올리면 마음이 늘 무겁다. 생일잔치 장소를 향해 신나게 걸어갔을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무거움이 조금은 걷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년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가 활동한지 1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5년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고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의미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15년 아메리카 군대를 기소한다』(2008. 10. 26)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책에는 미군범죄와 한미 SOFA, 주요 사건사고, 활동가들와 피해자들의 이야기, 관련 논문 등이 실려있습니다. 책에 실린 내용 미군범죄의 발생과 대응, 문제점을 다룬  글을 [미군범죄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일주일에 1회씩 9번에 걸쳐 연재려고 합니다. 

[미군범죄 어제와 오늘]
글 싣는 순서
(1) 공식 기록에도 남지 않는 미군범죄 (1945년~1966년)
(2) 어렵게 체결한 SOFA, 그러나 1%도 처벌하지 못한 미군범죄
(3) 윤금이씨 살해사건 해결을 위해 모인 사람들, 15년의 시작
(4) 한미행정협정개정위원회 구성, 미군범죄 신고센터 개설, 용산 미군기지앞 금요집회
(5) 죽어서야 기억되는 여성들
(6) 피고인 없이 진행된 재판 - 법정에 선 환경 범죄
(7) SOFA 개정을 위한 끈질긴 노력
(8) 늘 무겁게 되뇌는 이름, 효순이 미선이 그리고 촛불
(9) 현행범 체포 후 최초의 구속, 그러나 미군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범죄